2010년 7월 15일 목요일

[Peter] 간만에 남기는 글

SFR회원 분들 다들 잘 지내시나요?
모두 잘 지내시길 기원합니다.

벌써 어느덧 모임 시작한지도 1년여가 지났습니다.
이제 좀 더 변화의 발판을 마련하기위해.
국내 블로그로 옮기던지 해야할 것 같습니다.
뭔가 쉽게 자료를 보고나 할 수 있는 점이 블로거에는 부족한 듯 싶군요.

여러분들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2010년 2월 21일 일요일

[Peter's Think About That]삶의 태도에 관한 좋은 글

John is the kind of guy you love to hate. He is always in a good mood and always has something positive to say. When someone would ask him how he was doing, he would reply, 'If I were any better, I would be twins!'




He was a natural motivator.




If an employee was having a bad day, John was there telling the employee how to look on the positive side of the situation.




Seeing this style really made me curious, so one day I went up and asked him, 'I don't get it!




You can't be a positive person all of the time How do you do it?'




He replied, 'Each morning I wake up and say to myself, you have two choices today. You can choose to be in a good mood or ... you can choose to be in a bad mood




I choose to be in a good mood.'



Each time something bad happens, I can choose to be a victim or...I can choose to learn from it. I choose to learn from it.




Every time someone comes to me complaining, I can choose to accept their complaining or... I can point out the positive side of life. I choose the positive side of life.




'Yeah, right, it's not that easy,' I protested.




'Yes, it is,' he said. 'Life is all about choices. When you cut away all the junk, every situation is a choice. You choose how you react to situations. You choose how people affect your mood.




You choose to be in a good mood or bad mood. The bottom line: It's your choice how you live your life.'




I reflected on what he said. Soon hereafter, I left the Tower Industry to start my own business. We lost touch, but I often thought about him when I made a choice about life instead of reacting to it.




Several years later, I heard that he was involved in a serious accident, falling some 60 feet from a communications tower.




After 18 hours of surgery and weeks of intensive care, he was released from the hospital with rods placed in his back.




I saw him about six months after the accident..




When I asked him how he was, he replied, 'If I were any better, I'd be twins..Wanna see my scars?'




I declined to see his wounds, but I did ask him what had gone through his mind as the accident took place.




'The first thing that went through my mind was the well-being of my soon-to-be born daughter,' he replied. 'Then, as I lay on the ground, I remembered that I had two choices: I could choose to live or...I could choose to die. I chose to live.'




'Weren't you scared? Did you lose consciousness?' I asked



He continued, '..the paramedics were great.




They kept telling me I was going to be fine. But when they wheeled me into the ER and I saw the expressions on the faces of the doctors and nurses, I got really scared. In their eyes, I read 'he's a dead man'. I knew I needed to take action.'




'What did you do?' I asked.



'Well, there was a big burly nurse shouting questions at me,' said John. 'She asked if I was allergic to anything 'Yes, I replied.' The doctors and nurses stopped working as they waited for my reply. I took a deep breath and yelled, 'Gravity''




Over their laughter, I told them, 'I am choosing to live. Operate on me as if I am alive, not dead.'




He lived, thanks to the skill of his doctors, but also because of his amazing attitude... I learned from him that every day we have the choice to live fully.




Attitude, after all, is everything
.

After all today is the tomorrow you worried about yesterday.




You have two choices now:




01. Delete this




02. Forward it to the people you care about.



You know the choice I made.

2010년 2월 9일 화요일

괜찮은 마인드맵 어플리케이션 소개~

http://blog.naver.com/jjs2net/110069613570

2010년 1월 24일 일요일

[Peter's Think about that] 박노해시인과의 대화

http://www.ra-wilderness.com/board/bbs/board.php?bo_table=ra_board&wr_id=166


"네가 좋아하는 것을 해라" "네가 잘하는 일을 해라" 이런 말, 고맙다기보다 오히려 듣기 괴롭다면...

대화내용 중....

===
맞다.. 요즘 우린 저런 말을 많이 듣는데..
역시 박노해 시인은 우리사회의 부조리를 잘 알고 있단 생각이 든다.
정말로...

2010년 1월 22일 금요일

[Peter가 추천하는 전시] 박노해 사진전 라광야







지난 주에 박노해 시인님 사진전을 다녀왔다.
친구와 같이 갔었는데, 추운날씨에도 역시나 반갑게 인사해주시는
여러 나눔문화 연구원님들 참 반갑다.^^
미리 준비되어있는 차(샤이) 한잔을 마시면서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더니,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사진들에 담겨있는 아저씨, 아주머니, 아이들, 노인분들의 눈빛 속에는 이제
그 아픔도 익숙해진 듯 체념이 느껴졌다.
아픔이 삶속 깊숙히 박혀있어, 이제는 그 아픔 조차 보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머리속에 그리면서....
특히나 아이들의 사진이 마음속에 오래 머무른다.
총을 들고 서있는 세 아이들. 전사한 형의 사진 앞에서 앉아있는 형제.
그들에게는 이미 전쟁, 죽음이라는 것이 익숙한 삶의 일부이리라...
넓은 땅, 아름다운 강, 고풍스런 고건축물... 하지만 색깔이 없다.
회색. 한 가지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표정, 그들의 행동에도..
우리가 가지고 느끼고 있는 여러가지 색깔 중에서 한 가지 만이라도
전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난민들의 입장에서는 무언가 희망을 품고 기댈 수 있는 색깔이 분명 있겠지.
제3자의 시각에서는 알 수 없는 그런 색깔.
자신들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색깔.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신이 태어나고 문명이 만들어진 축복의 땅이
더 이상 사람이 살 수없는 고통의 땅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회색이 어울리는 곳이 아니라 컬러가 더 어울리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다음엔 형형색색의 사진들을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색깔에 맞는 사람들의 웃음이 보고싶다.


http://ra-wilderness.com/ 라광야 홈페이지.

2010년 1월 20일 수요일

[Peter's Think about that]아이티 정치적 위기의 근원

아이티 위기의 근원은 식민지 역사다

클레어 퍼몬트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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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백 년 전에 투쌍 루베르튀르가 이끄는 노예들의 오합지졸 군대가 유럽의 우수한 식민지 군대들을 물리치고 아이티의 독립을 쟁취했다(투쌍 루베르튀르 자신도 노예였다). 이 놀라운 혁명은 아이티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의 지배 열강들은 아이티와 아이티 민중의 승리를 결코 잊은 적이 없었다.

1700년대에 아이티(당시 이름은 산 도밍고였다)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식민지였다. 부의 원천은 그 섬의 풍부한 플랜테이션들과 아프리카에서 잡아 온 노예 50만 명에 대한 야만적 착취였다.

1791년 산 도밍고의 노예들은 프랑스 혁명 사상에 고무돼 봉기했다. 농기구만으로 무장한 그들은 그 뒤 12년 동안 노예 소유주들이 끌어 모은 무장 세력들, 스페인 침략군, 영국군 6만 명(한때 7일 동안 일곱 차례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다)을 잇따라 물리쳤고, 마침내 대규모 프랑스 원정대도 물리쳤다.

그 혁명은 아메리카 전역의 노예 식민지들에 충격을 주었고, 다른 노예 반란들과 존 브라운 같은 노예제 폐지론자들을 고무했다.

노예 소유주였던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아이티를 고립시키는 운동에 앞장섰다. 승리한 노예들은 식인종으로 매도당했다. 아이티와의 무역은 제품 구매를 거부당하거나 미국 상인들의 이익에 맞게 조작됐다. 아이티 독립 승인은 62년 동안 거부당했다.

한편, 아이티인들은 그들의 피만이 아니라 현금으로도 독립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프랑스는 독립의 대가로 1억 5천만 금화 프랑(오늘날 금액으로는 약 2백10억 달러)을 요구했다. 노예 소유주들과 그 상속인들에 대한 보상금이라는 것이었다. 첫번째 분할 지급액 2천4백만 프랑의 지급 기일이 도래하자, 아이티(프랑스 해군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는 그 돈을 프랑스에서 빌려 오지 않으면 안 됐고, 이 때문에 아이티 경제는 옛 식민지 주인들이 주무르게 됐다.

아이티에 대한 프랑스의 금융 지배는 1915년 미국이 아이티를 침공해 봉기를 분쇄할 때까지 계속됐다. 그 뒤 19년 간의 군사 점령기에 미국 해병대는 약 6만 명의 아이티인들을 학살했다. 미군은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아이티의] 대통령을 임명하고 경제를 지배했다. 미군은 세관ㆍ중앙은행ㆍ금 보관소 등을 점령했고, 다시 코르베(강제 노동 제도)를 도입해 도로 건설과 다른 사업들을 시행했으며, 외국인들이 토지를 소유하고 자원을 약탈할 수 있도록 아이티 헌법을 개정했고, 무자비한 탄압으로 악명 높은 군대를 창설하고 훈련시켰다.

1956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파파 독”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미국은 “공산주의” 쿠바에 대항하기 위해 뒤발리에 정권을 지원했고, 뒤발리에는 통통 마쿠트 민병대의 도움을 받아 독재 정권을 수립했다. “파파 독”의 뒤를 이어 “베이비 독”이 1971년부터 1986년까지 통치한 뒤발리에 독재 정권은 수만 명의 아이티인들을 학살하고, 국고에서 수억 달러를 도둑질했다.

“파파 독”과 “베이비 독”

1980년대 말에 가톨릭 신부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포르토 프랭스[아이티의 수도] 빈민가에서 해방신학을 설파하며 갑자기 빈민들에게 희망을 제공하는 듯했다. 그는 1990년 선거에서 엄청난 지지를 받으며 집권했다.

개혁 조처들을 시행하려던 아리스티드의 노력은 외세의 개입에 부딪혀 좌절했다. 통화 가치는 절반으로 떨어졌고 실업이 증가했으며 빈곤이 심화했다. 미국이나 국제 금융계보다 전투적 대중을 더 두려워한 아리스티드는 민중에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호소하지 않고 온유한(그리고 가난한) 상태로 머물러 있으라고 그리스도교 식으로 간청했다[편집자 주 ―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마태 5:3)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누가 6:20)].

미국이 훈련시킨 군인들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아리스티드는 집권 7개월 만에 쫓겨났다. 수천 명의 아이티인들이 살해당하고 고문당했다. 유엔은 아이티인들을 도와 주겠다며 경제 제재를 가했다. 아이티의 빈곤은 더 심해졌다.

3년 뒤인 1994년 9월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자신이 아이티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아리스티드가 권좌에 복귀할 수 있도록 2만 명의 군대를 파병한다고 공표했다.

“민주주의 회복 작전”의 배후 동기는 클린턴이 주장한 것과는 사뭇 달랐다.

첫째, 클린턴은 미국 해안으로 몰려드는 수천 명의 아이티 “보트 피플”에 대한 미국 국내의 적대감에 직면해 있었다. 이것은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하면 해결하겠다고 공약한 “위기”였다.

둘째, 이제 막 소말리아에서 치욕을 당한 미국에게는 군사적 성공 사례가 필요했다.

셋째, 미국 당국은 아이티의 군대가 머지않아 민중 반란으로 타도당할까 봐 두려워했다.

넷째이자 결정적 요인은 아리스티드 자신이 미국의 볼모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아리스티드는 자신이 권좌에 복귀하는 대가로 국제 자본이 아이티 경제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데 동의했다. 1993년에 그는 저임금 유지, 국유기업 민영화, 관세와 기타 수입 규제 조처 폐지 등을 요구하는 국제통화기금(IMF)의 프로그램을 받아들였다. 원조는 가장 중요한 국유기업 아홉 개를 민영화하겠다는 아리스티드의 동의와 노골적으로 연계돼 있었다.

아리스티드 정부가 추진한 이런 정책들은 당연히 빈곤과 불평등 심화를 초래했다.

이조차도 국제 늑대들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2000년 5월 선거에서 아리스티드의 라발라스 가(家) 정당이 미국이 선호하는 후보들을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승리했다. 미주기구(OAS)의 지원을 받는 야당들은 부정 선거였다고 비난했고, 정부는 굴복하지 않았으며, 아이티인들은 또다시 수백만 달러의 원조 중단이라는 국제적 처벌을 받아야 했다. 몇 달 전에 서반구 최빈국인 아이티는 미국에 대출 연체금 3천만 달러를 갚아야 했다.

이 모든 것이 현재의 위기를 설명해 준다. 애초 공약을 지키지 못해 인기가 폭락한 아리스티드 정부는 지금 경찰 폭력과 시위 진압에 의존하고 있다. 미국은 야당 세력을 후원하고 경제의 숨통을 죔으로써 민주주의를 계속 훼손하고 있다. 복수는 계속되고 있다.

ⓒLeft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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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의 자연재해로 수백만명이 죽고 부상을 당했다. 백만명이 넘는 고아가 발생해서 여기저기
입양하겠다는 사람도 줄을 섰다. 매일매일 아이티로 구호물품이 보내지고 있으며, 자원봉사자들이 속속 들어가고 있다. 늘 어려움은 삶이 어렵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아이티는 자립도가 낮고, 빈익빈 부익부가 심하다. 결국 강대국들에게 좌지우지 되고 있는 아이티..
재해를 잘 극복하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시절이 왔으면 좋겠다.


-Peter

2010년 1월 15일 금요일

과시적 소비와 베블렌재
사치스런 소비를 즐기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이다.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황금은 창녀를 귀부인으로 만들기도 하고, 노파를 젊은 여자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돈의 유희로 소비를 즐기려 한다.
사치스런 소비의 역사는 19세기 미국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자유분방 한 개인주의적 문화 속에 황금의 시대(the Gilded Age)가 도래했고, 그 호경기를 즐겼던 소비의 유희는 아직도 악명이 높다.
승마에 초대 된 손님이 말 위에서 요즘 시가로 1만달러짜리 음식을 대접받고, 100 달러(현시가로 5000달러) 현찰로 말아서 만든 담배를 피웠으며, 멀쩡한 이를 뚫어 다이아몬드를 박아넣거나, 강아지에게도 1만달러짜리 목걸이를 걸어 주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거부 짐 브래디는 친구 러셀에게 자전거를 선물했는데 바퀴살은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 루비로 장식돼 있었다고 한다. 또한 파티에 초대된 모든 손님에게 다이아몬드 시계와 브로치를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사파리 클럽을 조직했던 스테토스 부인에게는 50만달러의 회비를 내면서 모든 가구를 악어 가죽으로 장식하자는 사람들이 즐비하게 모여들었다(김학은 ‘폰지게임과 베짓처방’에서 사례 인용). 이쯤 되면 우리의 밍크 코트는 아이들 장난감 구입에도 미치지 못하리라. 아무리 돈이 많기로서니 어떻게 그런 소비행태를 나타낼 수 있는가.

당대를 살며 사치적 소비의 극치를 목격했던 경제학자 베블렌(T.Veblen)은 이런 현상을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라고 설명한다.
필요에 의해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자랑하기 위한 경쟁의 본능에서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황금을 축적하는 경쟁에서 소비가 부(富)의 상징이 되고, 사치스런 소비와 여가를 즐기는 유한(有閑)계급이 등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한계급의 과시소비는 물질적 낭비에 그치지 않고 선물이나 상패, 애완 동물, 호화여행, 사치스런 교육행태 등 점차 모든 부문에 파급된다.

과시소비에서는 구매를 결정하는 변수가 보통의 소비와는 다르게 나타 난다.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경우에는 오히려 가격이 오를수록 수요가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난다. 흔히 사치 품에 많이 나타나는 기현상이다. 과시소비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남에게 과시할 수 있는 가격수준이 높을수록 수요가 늘어난다.

예를 들어, 어떤 보석이 실제로는 100만원인데 남들이 생각할 때 200만원이라고 여겨진다면 그 보석의 과시가격은 200만원이 된다. 과시소비는 과시가격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증가하는 특징이 있다.
이런재화를 베블렌 재(Veblen’s goods)라고 부른다.
보석이 대표적이다. 희귀하고 남들이 구하기 어려울수록 비싸진다.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 보석들을 알면서도 많이 사는 이유도 남들에게 ‘진품처럼’ 과시할 수 있는 가격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진실을 알고 있다면 베블렌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과시소비의 전형은 우리 사회에도 많다.
오히려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 때문에 과시소비가 서구보다도 더 보편화된 일면도 있다.
베블렌은 미국의 대공황을 예언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과시소비의 절정은 결국 베블렌의 예측대로 대공황으로 이어졌다.
어느 나라에서도 밍크는 장난감이 아니다.
속을 허(虛)하게 만드는 과시소비는 모든 것을 허망하게 만드는 마력도 가지고 있다.
그것도 돈이 부리는 재주의 하나다.

정갑영의 풀어쓰는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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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관련 기사를 보니 베블렌 재, 베블렌 효과에 대한 것을 듣게 되었다.
찾아보고 이해해보니 정말 그런 듯. 결국 평균이상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고급 소비재의 가격은
그 제품의 실제 가격보다는 사람들의 머리속에서 나오는 것 같다.
일종의 추상적인 가격이랄까.
이런 부분들도 좋은 토론 주제가 되지 않을까 싶다.

2010년 1월 3일 일요일

[모임장] Peter's 신년 첫 모임 후기















<열띤 토론 중인 회원 Hana와 Dool> <토론장소 Toz 룸의 배경>


2010년 첫 모임을 1월 2일 강남 토즈에서 가졌습니다.
다들 지각에 한 시간 반이나 늦게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1시간 가량의 토론시간을 가졌군요.
첫 모임의 주제 선정자는 저였습니다.

주제는 "프로페셔널(professional)과 아마추어(amateure)의 차이 및 정의" 입니다.
여러모로 어렵지만 흥미로운 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객관적으로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를 정의해보려고 노력했고, 과연 프로페셔널의 조건은
어떤 것들이 있을 지 토론해 보았습니다.

















<프로페셔널의 조건들 메모> <토론 중에 개념들에 대한 메모>

결론적으로 모두들 정의에 어려움을 피력했습니다. 그만큼 그 차이를 설명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죠.

1. 기본적으로 토론 중에서 모두 동의 했던 내용은 프로와 아마의 차이가 개인이 일이나 어떤 것에 가지는 태도나 정신적인 측면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미리 준비해갔던 다양한 신문기사나 자료에서 가장 많이 나왔던 프로와 아마의 차이에 대한 의견입니다.

2. 두 번째로 모두 동의 했던 내용은 실 사회에서 개인들이 각자의 Job을 가지고 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경험이 많아질 수록 프로페셔널에 근접하게 되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피라미드 그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개인이 프로페셔널이 되는 것은 아니며, 어느 정도는 아마추어의 자리에 도태되는 개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개념도는 아래를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
<프로페셔널의 조건에 대한 개념도(시간 및 경험이 변수)>


3. 프로페셔널의 조건에는 기본적으로 시간과 경험 변수 외에 어느 정도 수익이 있어야하고 분야에 대한 지식, 일에 대한 즐거움(Hana회원 강조), 개인에 대한 인지도 수준에 대한 의견이 고루 나왔습니다.

4. 다음으로 각 대표 직업별로 프로와 아마의 차이가 있는지 토론해 보았습니다. 스포츠 분야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사무직, 예술직, 기술직 등은 명확한 구분이 어렵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5. 우리는 최종적으로 모든 개인은 직업 전선 혹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뛰어들 때 프로페셔널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개인의 기술 수준이나 인지도 등을 다 떠나서 기본적으로 프로페셔널의 테두리안에 들어오게 되며 아마추어 단계를 벗어나기 위해 일을 배우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단계에서는 (첫 개념도 처럼) 프로가 되는 순간을 맞이 하는 것이죠. 어떤 개인을 프로페셔널이라고 규정지을 만한 객관적인 시기는 없습니다. 그야말로 어느 순간인 셈이죠.

[의문점] : 우리는 토론하면서 다음의 문제 점에 봉착했습니다. 위와 같은 개념도와 같을 때 은퇴한 후 직장이 없는 개인을 과연 프로페셔널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에 관한 것 입니다. 그들은 보수를 받지 않으며, 이미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은둔중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필요하면 그들의 지식을 내놓겠죠. 이런 은둔자들을 우리는 프로페셔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까요?


SFR의 신년 첫 토론에서는 위와 같은 내용이 나왔습니다. 회원분들은 글을 보시고 잘못된 점이나 보충사항이 있으면 댓글에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모임은 2월 6일 토요일 2시 입니다. 모두 늦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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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R에서는 토론에 관심있는 다양한 분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열린 사고를 가지고 다양한 주제를 토론하고 싶은 분은 메일 주시기 바랍니다.

SFR Peter email : dongkune@gmail.com

모두 행복한 일요일 오후 되세요!^^

[후기] ㅎㅎ

ㅎㅎ 마지막의 대반전 질문...
"장인도 벽에 똥칠할 때면 더 이상 장인이 아닌것인가???" ㅋㅋ
감동먹었습니다.

아무튼... 그 때 살짝 나왔던 어느 과학자의 얘기 옮김니다.
막상 보니 관련이 없는것 같기도 하네여~ㅎㅎ 그래도 상식 증대 차원에서~~^^

참고로 '푸앵카레 추측'은 프랑스 수학자 푸앵카레가 제기한 가설로 100년동안 풀리지 않았던 세기의 난제입니다.



그리고리 페럴만(Grigori Perelman)이 세계적인 난제로 남아있던
'푸앵카레 추측(the Poincare' Conjecture)'을 풀어 증명하는 모습


러시아의 한 천재 수학자의 '기행(奇行)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언론에 연일 화재가 되고 있다. 수학의 최대 난제 가운데 하나인 '푸앵카레 추측'을 푼뒤 홀연히 자취를 감춘 그리고리 페렐만 (40)애기다.

그는 2002년 '밀레니엄 7대 난제'로 통하는 푸엥카레 추측을 10년간의 노력끝에 푸는데 송공하고서도 이를 유명학회지에 발표하는 대신 인터넷에만 공개하고 미국을 떠나 고향인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페럴만은 90년 대 초반 연구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었다. 그는 프린스턴,스탠포드 등 미국 유수 대학의 초빙제안을 거절한 것은 물론 미국 클레이 수학연구소가 '푸앵카레 추측'을 해결한 사람에게 내건 상금 100만 달러도 거부해 화제를 모았다.

고향으로 돌아간 페렐만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최고 권위의 '스테클로프 수학 연구소'에서 연구활동을 계속해 왔으나 올해 1월에는 이곳에도 사직서를 내고 완전히 은둔해 버렸다. 그는 수학게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 메달' 수상도 뿌리쳤다. 22일 스페인 마드리에서 열린 시상식에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는 "소련 시대에는 학자들이 최고의 엘리트 대우를 받아 젊은이들은 몰렸지만 지금은 세상이 완전히 변했다'며 "오로지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만이 연구소에서 일한다"고 설명했다. 월 수천~수만 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사업가들이 호화생활을 뽐내는 현실에서 초연하게 학문에게 매달리는 진정한 학자들이 러시엔 살아 있다는 것이다.....

2009년 12월 29일 화요일

[SFR]연말모임공지

2009년 12월 31일
마지막날 저녁 6시
마지막 모임을 합니다.
모두 참석바랍니다.

회비는 2만원씩입니다. 모든 회원 참석바랍니다.